QT

믿음의 눈 [요 9:13 - 23]

leeapostle 2011. 3. 17. 07:34

9: 13 그들이 전에 맹인이었던 사람을 데리고 바리새인들에게 갔더라
 14 예수께서 진흙을 이겨 눈을 뜨게 하신 날은 안식일이라
 15 그러므로 바리새인들도 그가 어떻게 보게 되었는지를 물으니 이르되 그 사람이 진흙을 내 눈에 바르매 내가 씻고 보나이다 하니
 16 바리새인 중에 어떤 사람은 말하되 이 사람이 안식일을 지키지 아니하니 하나님께로부터 온 자가 아니라 하며 어떤 사람은 말하되 죄인으로서 어떻게 이러한 표적을 행하겠느냐 하여 그들 중에 분쟁이 있었더니
 17 이에 맹인되었던 자에게 다시 묻되 그 사람이 네 눈을 뜨게 하였으니 너는 그를 어떠한 사람이라 하느냐 대답하되 선지자니이다 하니
 18 유대인들이 그가 맹인으로 있다가 보게 된 것을 믿지 아니하고 그 부모를 불러 묻되
 19 이는 너희 말에 맹인으로 났다 하는 너희 아들이냐 그러면 지금은 어떻게 해서 보느냐
 20 그 부모가 대답하여 이르되 이 사람이 우리 아들인 것과 맹인으로 난 것을 아나이다
 21 그러나 지금 어떻게 해서 보는지 또는 누가 그 눈을 뜨게 하였는지 우리는 알지 못하나이다 그에게 물어 보소서 그가 장성하였으니 자기 일을 말하리이다
 22 그 부모가 이렇게 말한 것은 이미 유대인들이 누구든지 예수를 그리스도로 시인하는 자는 출교하기로 결의하였으므로 그들을 무서워함이러라
 23 이러므로 그 부모가 말하기를 그가 장성하였으니 그에게 물어 보소서 하였더라

 

월요일 본문을 통해 보았던 예수님의 인격적인 치료로 인해서 맹인은 눈을 뜨게 되었다. 그리고 그의 영적인 눈도 뜨게 하셨다.
그 영적인 눈이 뜨였음을 보여주는 오늘 본문 17절에서 예수님이 누구냐고 묻는 바리새인들을 향해 그는 '선지자니이다' 하고 대답하고 있다.
이것은 단지 선지자라는 답변만을 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. 왜냐하면 바리새인들의 행동이 다분히 공격적이고 적대적이었기 때문이다.
그의 부모는 그것이 두려워 답하기를 꺼려했음을 오늘 본문을 통해서 본다.
즉 영적인 눈이 뜨였다고 하는 것은 단지 예수님이 어떤 분인가를 아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그를 따르기로 결심했음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.
예수님은 인격적인 치유를 통해 맹인에게 진짜 믿음의 눈을 주신 것이다.

그러나 그와는 반대로 맹인이 눈뜬 것을 눈 앞에서 보고도 그것을 의심하는 바리새인들의 모습이 있다.
그들에게는 어쩌면 믿어서는 안될 이유가 있었는지 모르겠다.
요즘 나에게서 자주 발견하는 모습이 바로 이 모습이다.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해놓고선 나의 방향은 전혀 다른 곳을 향해가고 있는 것이다.
그런데 오늘 본문을 통해 보게 되는 것은 때로는 바리새인들처럼 내가 생각한 것을 하나님 앞에서 주장하고 있었다.
내 생각대로 되지 않기에 눈 앞에 보이는 하나님의 뜻을 쫓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.
그 뿐만이 아니라 때로느 맹인의 부모처럼 눈 앞에 두려움때문에 예수님을 쫓지 못하는 나를 발견한다.

문득 주일에 들었던 말씀이 생각이 났다. 약속의 땅을 떠나 애굽으로 가야만 하는 하나님의 뜻하심!
지금 나는 약속의 땅에 머물겠다고 고집부리고 투정부리는 것은 아닐까...?